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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골드삭스 2007. 7. 29. 14:17

1. 들어가며

청소년기를 거치며 인간은 누구나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저마다 그 답을 찾는 동안 많은 방황을 하게 되고, 꿈을 갖게 되고, 그리고 이를 이루거나 포기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다룬 소설을 성장소설이라 하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형의집]이나 [꽃들에게 희망을]을 들 수 있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자신이 '아버지의 인형''남편의 인형'이었다며 집을 나서는 것으로 끝난다. 그 시점에서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일지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라는 답답함을 느꼈었다. "어쩌면 입센은 문제의식만 갖고 있을 뿐 진정한 자아를 찾기위한 모험을 아직 시도해 보지 않았기에 한발자국 더 나갈 수 없었기에 여기에서 멈춘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생겼었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줄무늬 애벌레의 문제의식과 그의 모험... 그리고 애벌레탑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되는 것이 그들의 참된 비젼임을 알게 된다는 스토리에는 공감한다. 문제는 그다음... 애벌레들은 우연히 고치를 보고 진로를 바꿔 너무나 쉽게 고치를 틀고...나비가 되었다. 트리나 포올러스는 그처럼 쉽게 자신의 비젼을 찾고, 그것을 이루어냈을까?  단번에 나비가 되는 데 성공했을까?  책속의 애벌레의 세계와는 달리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앞을 알 수 없는 미로이고, 그리고 애벌레와 달리 현실의 인간실존은 더 버겁고 불안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비가 되는 과정에 대한  이 책의 설정은 개연성이 적고, 근거없는 낙관으로  현실이 아닌 허구의 냄새가 작품의 생명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도 [인형의 집]이나 [꽃들에게 희망을]처럼 독자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잎싹'이라는 암탉의  자아 탐구 과정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앞선 두 책보다 더 진지하게 현실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하에서는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인형의 집]과 [꽃들에게 희망을]과 비교해 가며, 저자가 독자에게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방식과 그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생각하며... 

 [인형의 집]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집밖을 나온 노라가 만나게 될 참혹한 현실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양계장을 벗어난 잎싹은 온몸으로 버텨낸다.  그러나 잎싹의 꿈은  [꽃들에게 희망을]의 애벌레의 비젼 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꽃들에게 희망을]의 줄무늬 애벌레는 우연히 '나비'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꼬치를 발견하고,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고 한번 망설이다가 고치 만들기를 시도하게 되고, 그 결과  단번에 나비로 성장해 꿈을 이루었다.  물론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었기에 꽃들은 수정되고, 번식할 수 있게 되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암탉 잎싹은 양계장 문틈으로 내다본 마당의 토종닭 가족을 보고, '암탉답게 알울 퓸어 병아리를 기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간신히 양계장을 탈출해 마당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마당식구들은 입싹을 거절했고, 잎싹은 외톨이로 버려지게 된다. 게다가 양계장과는 달리 바깥 세상은 먹이도 없고 안전하지도 않았다. 호시탐탐 잎싹을 노리는 족제비의 위협과 먹이감을 직접 구해야하는 고단함은 자유와 꿈을 얻기위해  잎싹이 지불해야만 했던 댓가였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이미 알을 낳을 수 없는 폐계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 잎삮의 소박한 꿈은 참담하게 깨어진다.  이때 잎싹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좌절한다.  하지만, 버려진 청둥오리알을 품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출산의 좌절로 시작된 입양... 그것은 또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아기 초록머리는 엄마와  다른 자신의 외모와 존재방식으로 인해 엄마를 부정하고 집오리에게로 떠났다가 버림받고 또다시 청둥오리에게로 떠난다.  하여 잎싹은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새끼를 품은 엄마의 아픔을 느껴야만했다.  

 

이 부분에서  [꽃들에게 희망을]의 한계 - 근거없는 낙관주의나 우연에 의한 허구적 구성-을 뛰어넘어 현실의 참혹함을 그대로 반영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잎싹의 아픔이 나 자신의 상처인듯 가슴이 찌릿찌릿 아리고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는 물안개처럼 내 마음을 뿌옇게 가라앉혔다. 

 

처음엔 그것이 조물주를 향한 분노인 줄 알았다. 하나님은 왜 앙칼진 토종닭 암탉에게는 허락된  알을 낳고 기르는 소박한 꿈을 잎싹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조물주의 뜻이 아닌 인간의 욕심때문이었음을!  조물주가 부여한 암탉의 존재이유는 그 본능으로 심어진 "알을 낳고 품어 병아리로 깨어나게 하고 기르는 것"이었는데  인간이 암탉의 존재 이유는 제맘대로 '시장에 팔아 돈을 벌게 할 알을 낳는 것'으로 바꿔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토종닭이 고깃감으로 제값을 받을 수 있기에 시장에 내다팔 토종닭을 늘리기 위해 양계장 주인은 토종닭 암탉에게 알을 낳고 기르는 꿈을 허용한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과연 인간에게 다른  종의 존재 방식과 존재 이유를 규정할 권리가 있는가?  인간은 자연을 쓸모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으로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인가?  주목을 보며 쓸모없기때문에 오래산 나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장주의 꿈에 나타난 나무의 정령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논쟁하자고 하지 않을까?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를 말이다.

 

아~ 혹시 나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에게 이런 월권적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지나다니는 길가의 가로수에게, 내가 밟고 다니는 보도 블럭 빈틈에 난 이름없는 들꽃에게, 그들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인정해주지 않고, 내가 갖고 있는 틀 속에서 재단하여 문제아, 잡목, 잡초라 이름붙이지는 않았을까?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잔인함에 화가 났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는 노랑애벌레가 줄무늬애벌레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잎싹은 언제나 외톨이였고, 동정이나 공감은 받은 적이 있을지 몰라도 사랑받은 적은 없었다. 이것은 잎싹에게 너무 잔인하다.

 

잎싹이 양계장에 머물던 시절... 잎싹에게 암탉 친구가 없었다. 옆자리에서 모이를 먹던 닭들과 대화를 나눈 부분이 없다. 누구도 잎싹에게 '아프냐?' '모이를 먹고 건강해지라' '고민있니?'고 물어주지 않았고, 걱정해주지 않았다.  양계장에서 잎싹이 과감하게 탈출한 이유는 이미 그곳에서도 외톨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잎싹이 마당에 머물던 짧은 시간 ... 날개다친 청둥오리의 동정을 산다. 그러나 여기서도 배척당해 외톨이로 지냈다.

 

잎싹이 알을 품고 있던 시기 ... 날개다친 청둥오리는 자신의 새끼를 품어주고 있기에 잎싹을 지켜준다. 자신과 같은 꿈을 꾸고 있기에 공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잎싹은 청둥오리가 자기 알이 아님을 알고 뺏아갈까봐, 청둥오리는 잎싹이 품은 알이 오리알인지 알면 품어주지 않을까봐 말할 수 없었다. 신뢰없이 사랑도 없다. 서로 도와주고, 고마와하고, 존경하고, 지켜줄 수 있었지만, 서로의 빈 마음을 채워주는 관계는 될 수 없다.

 

아기초록머리와 함께 있는 동안도 처음에 아주 잠깐만 몸과 마음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아기는 금방 크고 곧 엄마와 자신의 차이를 인식했고 자신의 동종 속으로 돌아가고자 엄마를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잎싹은 가장 소중한 꿈(자식)이 자신을 버렸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도 두번이나 . 한번은 집오리들에게로, 또한번은 청둥오리에게로 . 

 

그리고, 아기 초록머리는 청둥오리떼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는 엄마뿐이라며 돌아오겠다고 할때 잎싹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잎싹은 사랑하기에 초록머리를 떠나 보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멀리서나마 초록머리를 보는 것을 낙으로 삼다가 초록머리가 떠나자 생의 의지를 잃고 평생의 원수였던 족제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족제비 새끼의 먹이감이 되어주고자.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울어버렸다.  잎싹의 사랑이 위대해 보여서가 아니라 가여워서... 그리고 저자에게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작품의 감동을 더하기 위해 잎싹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한번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자가 과연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언제나 외톨이였던 자가 진정한 하나됨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이것은 너무나 작위적인 설정은 아닌가?  무조건적 사랑이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것아닌가?   일방적 사랑이라니, 어미만이 가질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을 통한 승화라니...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나 가능하다.  인간이 어떻게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 없음에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성숙되어 갈 수 있겠는가? 

 

꿈과 자유를 위해 사회의 주어진 틀을 벗어난 자는 둘 중의 한 길을 걷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지도밖으로 행진하는 한비야의 길이고, 또하나는  버지니아공대의 참사를 일으키는 조승희의 길이다.  전자는  여러 사람과의 교제하며 그 속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비젼에 대해 지지받으며, 타인도 행복해지고 자신도 성장하는 전진의 길이다.  그러나 후자는 외톨이로 고립되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망상을 꿈꾸고 다른사람들에게 지지받을 수 없는 자신을 선구자로 생각하고 타인을 망치고 자신도 망가지는 퇴보의 길이다.  두 길의 갈라지는 지점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라 생각한다. 

 

정말로 감동적인 결말을 읽으며, 분노한 이유는 현실의 세계에서  잎싹에게 조승희의 조건을 주고 한비야로 성숙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잎싹에게 부당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3. 정리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자유와 꿈 그리고 존재의 이유, 나와 다른 존재와 경쟁하고 사랑하고,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잎싹의 외로움이 가슴에 사무치고, 이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나도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살아가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워서 양계장으로 돌아가길 망설이기도 하고, 토종닭 암탉의 안락한 삶을 부러워도 하면서, 그럼에도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살아가길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잎싹의 말로가 내 말로와 동일시 되면서 분노가 느껴졌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죽을까는 선택할 수 있다. 비록 패배하고 비참한 결말을 얻는다해도, 자유를 추구하는, 꽃들에게 희망을 주길 원하고, 인형이 아닌 인간이길 꾸는 사람은 적어도 이해받고 사랑받으며 죽어야하지 않을까? ... 나는 돈이나 권력, 명예, 이런 것은 누리지 못하고 살지라도, 소풍끝나고 귀천하는 순간,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웃고 싶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전 재산과 내 낡은 육신은 기부하고 싶다. 누군가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육신의 잔해는 화장해서 이 산야에 뿌려지길 원한다. 잎싹처럼.

출처 : 작은샘의 herstory
글쓴이 : 작은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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